조선왕조, 농업이 '나라 근간'
천재지변 대비 다양한 구휼책 마련
강원도, "수해, 화재, 기근이 대표적 자연재해"
한반도 중부지방 동쪽에 위치한 강원도는 태백산맥에 의해 동서로 나뉜다. 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이 구분되면서 문화뿐만 아니라 기후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태백산맥은 북서 계절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영동지방은 겨울이 비교적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띠고, 영서지방은 여름이 짧고 서늘하며 겨울이 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강원도의 인문지리적 특성은 이중환의 『택리지』나 당시의 교서(敎書)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농업을 나라의 근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연재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농업은 날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고, 재해 발생 시 국가 경제와 통치 기능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왕조 역대 국왕들은 천재지변을 대비해 다양한 구휼책을 마련하였고,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당시의 자연재해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포함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강원도에서는 수재, 화재, 기근, 역병, 우박, 황충 등의 재해가 보고되었다. 대표적인 자연재해인 수재, 화재, 기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재는 발생 시기상 오늘날과 같은 장마, 집중호우, 태풍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강원 지역의 지형적 특성상 산과 계곡이 많아 비가 조금만 내려도 하천이 쉽게 범람해 큰 피해로 이어졌다. 특히 1711년(숙종 37) 수재의 경우 사망자 290명, 수몰 피해 가옥만 1,500여호로 역사상 가장 큰 피해로 언급되는 2002년 태풍 루사와 비슷한 피해 규모(인명 피해 246명)가 확인된다.
강원도의 화재는 건조한 12월부터 3~4월에 많이 발생했다. 특히 영동지역의 경우 태백산맥을 넘어오면서 건조해진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군현 경계를 넘어 5~6개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형화재로 발생하였다. 1804년(순조 3)에 3월에 있었던 대형산불은 동해안에 인접한 통천, 간성, 고성, 양양, 강릉, 삼척까지 포함해 발생한 것으로, 민가 2,600호, 원우(院宇) 3곳, 사찰 6곳, 창고 1곳, 곡물 600석, 선박 12척, 염분(鹽盆, 소금 끓이는 가마) 27좌(坐)가 소실되었다.

기근은 이전 해의 농사 결과와 이듬해의 자연재해가 맞물려 발생했다. 대부분 가뭄과 홍수의 영향이었으나 화재로 인한 기근도 적지 않았다. 강원도 기근의 피해는 영서지역보다 수전(水田)이 많아 가뭄, 홍수, 바람에 의한 피해가 잦은 영동지역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기근 중에는 1422년(세종 4), 1423년(세종 5)의 연속된 기근으로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고 조선 전기 강원도 최대치의 진휼곡(경원창 10,000석, 의창곡 62,400석)이 배급되었다.
자연재해 발생 시, 초기 구제는 각 지역의 담당 관리가 맡아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복구에 나섰다. 이들은 지역 내 식량과 자원을 활용해 구제에 힘썼으며, 피해가 심각할 경우 중앙에서 왕명을 받은 관리가 파견되어 추가 식량을 지원하는 등 보다 체계적인 구휼책이 시행되었다.
또한 농사의 풍흉을 세 단계로 나눠 조사하고, 이를 구제 재정의 기준으로 삼는 ‘재실분등’ 제도도 실시되었다. 하지만 강원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경작지가 적어 자체적인 구호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 등 인접 지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영서지역은 내륙 수로를 이용해 중앙이나 충청도로부터, 영동지역은 해로를 통해 주로 경상도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간혹 함경도에서 구호 물자가 전달되기도 하였다.
강원도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지역별 피해 양상과 대응 방식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으며,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작용하므로 자연재해 대비에 있어 참고할 만하다.

자료 출처 : (강원학 학술총서 20) 조선시대 강원도의 자연재해와 구제 정책(박범·문광균, 2022)
자료 도움 : 강원학연구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