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물자 배급> 소장처: 양양성당
한국전쟁은 총성이 멎은 뒤에도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했다.
강원도 역시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정부와 국제기구가 긴급 구호에 나섰지만, 턱없이 부족한 물자와 인력으로는 절망적인 현실을 막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원지역 가톨릭교회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넘어 지역 주민의 삶을 지켜내는 일에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지원받은 의약품과 구호물자를 나누고, 의료원이 없는 마을을 찾아가 환자를 돌보며, 나아가 농로와 식수 시설을 정비해 생활의 기반을 다시 세워 주었다.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전후 강원도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가톨릭의 구호 활동을 짚어 본다. .
한국 가톨릭교회의 구호 활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54년경 죽음에 직면한 고아들에 대한 구제에서 시작된 활동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76년 개항 이후 재개되어 무료진료소와 시약소(施藥所)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강원지역에서도 1880년대 성영회(聖嬰會, Sainte Enfance)를 통한 고아 구제나 시약소 등 가톨릭교회의 구호 활동이 있었으나, 그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은 한국의 사회적 기반을 많이 파괴하였다. 국토의 상실은 물론 생산 기반의 파괴와 많은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주미 대사이던 장면(張勉)은 유엔안보리에 피난민들의 의식주 해결을 위해 식량, 의약품, 의류 등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유엔과 국제기구의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부족한 물자와 예산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당시 구호가 필요한 이들은 남한 전체 인구의 50% 정도를 차지하였으나, 정부가 민간단체가 적절히 대응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 및 가톨릭구제회(CRS), 기독교연합봉사회, 기독교세계봉사회 등 여러 외국 원조단체들이 한국 전재민(戰災民)에 대한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38선이 통과하는 강원지역은 전쟁의 격전지였던 만큼 피해 규모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구호가 필요로 하는 이는 전쟁 직후 70만 명이었다. 하지만 정부를 비롯한 유엔이 제공한 구호물자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기아, 질병, 아사, 동사 등의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원지역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재건과 더불어 지역에 대한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활동을 크게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골롬반 의원> 소장처: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
첫째는 의료사업과 아동에 대한 보호와 관심이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는 의료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고, 강원지역 역시 의료시설과 의료 인력 모두 부족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가톨릭교회는 1955년 춘천 성골롬반의원을 시작으로, 1962년 삼척 성요셉의원, 1966년 강릉 갈바리의원을 차례로 개원하였다. 이들 의원은 이미 다른 나라와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수녀회가 파견되어 의료진 역할을 담당하였고, 의약품은 해외에서 모금이나 지원을 통해 의원으로 전달되었다.
1958년 작성된 「골롬반문서」에 따르면, 골롬반의원의 1년 진료자 수는 58,020명으로, 이는 당시 춘천교구 관할 구역 인구(약 15만 명)의 38.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병원에서는 진료 외에도 밀가루, 옥수숫가루, 분유 등 구호물자와 의류 등 구호품을 배포하였다. 삼척 성 요셉의원에는 경북 봉화, 울진, 포항 등지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와 병원 인근에 여인숙이 생길 정도로 붐볐다. 또한, 보건소 등 의료시설이 없는 주변 지역의 무의촌을 대상으로 방문 진료를 실시하고, 전염병 교육 및 예방 접종 등 보건교육 활동도 함께 진행하였다. 강릉 갈바리의원은 명주군, 고성군 등 해안 및 산간지방을 대상으로 첫날부터 200명 이상의 환자를 받았으며, 입원실이 없어 병원 인근 방을 임대해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강원지역 가톨릭교회가 설립한 이들 의원은 단순한 병원 진료를 넘어 무의촌 방문 진료와 전염병 교육 등의 보건활동을 전개하며, 당시 강원지역의 열악한 의료 현실 속에서 지역 공공의료의 공백을 메우며 지역 의료 환경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강릉과 양양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이들에 대한 양육뿐만 아니라 기술 교육을 하며, 아동 보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갈바리의원 기공식> 소장처: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
둘째는 구호물자 배급을 통한 자립 지원 활동이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 민간 구호단체로부터 받은 총 280만 달러 상당의 구호물자 중 약 71%가 가톨릭구제회에서 보낸 것이었고, 1960년대까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독일 미제레오(Misereor) 등 해외 가톨릭 원조기구의 지원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이 보낸 구호물자는 가톨릭구제회가 자체 사업을 운영하거나 한국 가톨릭 각 교구와 협력하여 피난민 구호에 활용되었다.
강원지역 가톨릭교회는 전달받은 구호물자를 교회가 자체적으로 분배하기도 하였으나, 지역 관공서와 협력하여 신자 여부를 가리지 않고 난민과 빈민 등 응급한 곳을 선정해 무상분배하였다. 당시 지역 일간지인 「강원일보」보도에 따르면, 춘천 죽림동 천주교회에서는 옥수숫가루 700포대와 분유 300상자를 무상 배급하였는데 이는 가구당 옥수숫가루 1말, 분유 3.3봉지씩이었다.
전쟁 직후 구호물자의 배급은 대부분 긴급 구제로, 의식주 해결에 집중되어 무상(無償)구호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가 진행되면서 식량 자급과 자립을 지향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구호방침도 무상 구호에서 유상(有償) 구호 배급 중심으로 바뀌었다. 유상 구호 배급은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지급되었고, 「강원일보」 보도에 따르면 춘천 근화동 하수구 준설공사, 묵호읍 발한천 준설공사, 원주 문막 경지 정리 및 도로 보수공사 등 강원도 각지에서 노동 제공에 대한 대가로 구호물자가 지급되었다.
즉 처음에는 긴급 구제의 성격을 가진 무상 배급이었으나, 점차 유상 배급으로 전환하여 자립의 기회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으로 변화된 것이다.

<화천 906표고농장> 소장처:춘천교구
셋째는 생활 기반 조성을 위한 지원사업의 전개이다.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경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에 막대한 물자를 무상 제공하는 단순한 생계 지원을 넘어 지역 사회의 생활 기반을 조성 지원사업으로 구호의 성격이 변화되었다.
이에 강원지역 가톨릭교회 역시 단순 구호에서 장기 구호로 성격을 전환하여, 생활 기반 조성을 위한 사업에 물자와 예산을 지원하였다. 예를 들면, 1966년 당시 명주군의 묵호, 주문진, 강동, 연곡, 구정, 왕산, 성산 등 8개 사업장에서 이루어진 배수로 준설공사와 농로 공사, 식수 공사 등이다. 이들 사업은 시설 확보를 통해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이를 통한 경제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고, 식수 공사는 불결한 물로 인해 파생되는 전염병의 예방 측면이었다.
또 화천의 906표고농장 및 김화의 축우 사업 등 지역 실정에 맞는 사업을 선정하고 이를 지원함으로써 농민 수익 증대와 이를 통한 지역 생활 기반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파괴된 성당에서의 장례식> 소장처: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
강원지역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 직후 단순히 교회의 재건에만 그치지 않고, 시대의 요구와 정책 변화에 부응하는 다양한 구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강원지역의 보건의료 환경 개선, 아동 복지, 생활 기반 조성을 위한 지원사업 등 지역과 공존하며 상생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자 수령증(철원군 서면장의 직인, 날인 포함)> 소장처:김화성당
자료 출처: (강원학 학술총서 22) 한국전쟁 이후 강원지역 가톨릭교회의 구호 활동(이원희,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