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탄광지에 핀 순백의 자연
태백시 지지리골길 17. 하이원태백복지관 옆으로 난 오솔길은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된다. 아스팔트를 벗어나면 길은 점점 흙빛을 띠며 부드러워지고, 어느새 양옆의 풀과 나무들이 조금씩 숲의 기운을 내뿜는다. 이 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으면, 어느 순간 눈앞에 순백의 풍경이 펼쳐진다. 자작나무숲이다.
그 줄기들은 마치 누군가 붓으로 매끈하게 칠해 놓은 듯 흰빛이 선명하고, 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숲 전체를 맑고 환하게 물들인다.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잎과 햇빛,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공기의 향기는 이곳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은 단순한 산책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태백은 오랫동안 ‘탄광의 도시’로 불렸고, 그 이름 속에는 산업화의 영광과 함께 가슴아픈 쇠락의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숲은 그 과거를 덮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새로운 생명을 덧입혔다.
하얀 나무 기둥 사이를 걷는 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탄광의 시절을 지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도시의 여정을 함께 걷는 일이다.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휴식과 회복을 찾으며, 마음속 오래된 그늘을 햇빛에 녹이는 것이다.

숲의 입구에는 석문이 서 있다. 그 위에는 박준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숲의 소리만 듣습니다.
문밖의 다른 소리에는 돌처럼 굳게 귀를 닫습니다.”
이 문을 넘는 순간, 세상의 소란은 멀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와 새들의 울음,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만 귀에 닿는다. 그렇게 숲은 누구에게나 고요와 평화를 선물한다.
‘지지리골’이라는 이름에는 오래전 사냥꾼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멧돼지를 사냥한 이들은 불에 달군 돌 위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돌을 경사지게 놓고 아래서 불을 피우면, 달궈진 돌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지금의 돌구이와 닮은 이 방식을 ‘지지리’라 불렀고, 그렇게 사냥꾼들이 자주 모여 지지리를 해먹던 골짜기라 하여 ‘지지리골’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제는 사냥 대신 산책과 사색의 땅이 되었지만, 이름은 여전히 옛 풍경을 담아 전한다.
이 자작나무숲은 ‘운탄고도1330’의 6길에 자리한다. 운탄고도1330은 영월, 정선, 태백, 삼척을 잇는 폐광지역 걷는 길로, 옛 산업로와 마을길, 산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 중 6길은 함백산 소공원에서 순직산업전사위령탑까지 약 16km를 잇는 구간으로, 장쾌한 풍경과 소박한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길을 걷다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길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순백의 나무들 사이에서 피톤치드 향이 가득 퍼지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깊숙이 맑은 공기가 스며든다. 긴 여정 속 한가운데서 만나는 이 숲은, 마치 길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같다.
지난 2023년,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은 또 한 번 변화를 맞았다. 1998년 폐탄광 복구조림으로 조성된 숲에 ‘도시숲’이 더해진 것이다. 국민의 보건과 휴양 증진, 탄소중립 실현을 목표로, 그리고 태백시의 지역 특성을 살린 관광 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숲에는 탄광촌 소년상과 광차 포토존 같은 상징물이 세워져, 태백의 산업 이미지를 기억하게 한다. 또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라,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미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지지리골 자작나무 숲은 사계절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봄에 연둣빛 새잎이 자작나무 줄기에 어우러지면 숲은 부드럽게 빛난다. 여름에는 짙은 초록이 머리 위를 덮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는 은빛 물결처럼 출렁인다. 가을이면 황금빛과 주황빛이 번져, 흰 나무줄기와 대비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자작나무의 계절인 겨울에는 눈이 줄기와 어깨를 덮어 숲 전체가 순백의 세계로 변한다. 계절마다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고요와 평화다.
숲을 찾는 사람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온다. 누구는 사진을 찍고, 누구는 조용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어떤 이는 벤치에 앉아 숲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이곳은 더 이상 과거의 탄광을 기억하는 아픔의 장소만이 아니다. 그것을 품고도, 새로운 생명과 이야기를 전하는 숲이다.
탄광의 도시가 품은 하얀 숲.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은 태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연과 사람을 잇는 하나의 다리이기도 하다.

관광 정보
-위치: 강원자치도 태백시 지지리골길 17
-운영 시간: 연중무휴
-입장료: 무료
(자료 도움: 태백시, 강원관광재단 / 사진출처: 강원관광홈페이지 https://www.gangwon.to/gwtou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