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애환을 잘 아는 도의원..“그렇기에 지역민 더 살핍니다”
이무철 도의원은 삶을 돌아보면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이 의원은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면 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많이 다녔던 기억부터 난다고 한다.
초등학교만 다섯 군데를 다녔는데, 춘천 효제초와 동춘천초, 신동초, 삼척중앙초 등으로 전학을 다니야 했는데, 친구를 사귀기도 전에 다시 짐을 싸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일찍 전역했는데, 그 뒤로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졌다. 일곱 식구가 방 하나에 모여 사는 생활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풍 때 도시락을 못 싸 가서 조용히 혼자 버텼던 일도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엔 집에 TV나 전화기도 없이 지냈다.
이 의원은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엄격했고, 때로는 폭력도 있어 부모의 부부싸움도 많이 목격하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컸던 것도 이런 집안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이무철 의원은 도의원이 되기 전에는 토목기사로 부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현장에서 일하는 게 잘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춘천으로 다시 올라왔고, 부친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됐다.
원래는 이전에 일한 경험을 살려 토목직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그 해에 토목직 시험이 없어 행정직을 치렀고 그렇게 해서 29년간의 공직 생활을 하게 됐다.
정년을 4년 정도 남기고 명예퇴직 한 뒤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레고랜드 주차장 공사나 군부대 수해 복구 현장 등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왔던 만큼,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점이 항상 마음에 남는다. 첫째 아이 태어날 때도 일 때문에 병원에 같이 있지 못했고, 어린이날에 아이들과 같이 놀아준 기억도 별로 없어, 그게 늘 미안하고 마음 한 구석이 아직도 아리다.
그래도 예전에 중국에서 파견 근무할 때 아이들과 두 달 정도 함께 지냈는데, 아이들이 그 당시 “아빠랑 이렇게 오래 같이 놀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해줬을 때, 아빠로서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이무철 의원은 인생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도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라고 한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정치를 하는 걸 반대했다. 그런데 아내가 어머니를 설득해서 출마를 결심했고, 가족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 보다 가족들이 더 기뻐했다. 그 때 가족들이 환호하는 모습은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고 한다.
이 의원은 강원도와 지역구 주민들에 대한 애착이 크다.
강원도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강원도는 제 고향이자 삶의 전부입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늘 함께한 땅이죠. 굳이 화려한 말로 꾸미지 않아도, 그냥 '내가 자란 곳'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은 누구보다 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지역구인 춘천 석사동과 효자2동에 대한 애정은 이런 말로 대신한다.
“석사동은 제가 7년 넘게 살았고, 지금도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있는 소중한 동네입니다. 효자2동은 제가 10살까지 살았던 곳인데, 지금도 예전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갈 때마다 마음이 참 따뜻해집니다. 마치 고향집을 찾은 듯한 푸근함이 느껴지죠.
이 두 동네는 저에게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제 삶의 중요한 한 조각이며, 그래서 주민 한 분 한 분이 늘 이웃처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런 애정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도심 속에서 발전이 정체되어 있는 현실이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효자2동은 고령화와 낙후된 생활 인프라, 석사동은 문화·복지·편의시설 부족 등으로 인해 주민들께서 일상에서 겪는 불편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지역이 삶의 질과 정주 여건이 함께 나아질 수 있도록, 보다 균형 잡힌 발전을 이루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