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의 기원은 A.D.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던 야생조상종이 볼리비아에서 멕시코까지 분포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재배형이 성립된 후 멕시코에서 재배형과 트리프사쿰속의 어떤 종의 교잡으로 급격한 진화가 일어나 옥수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멕시코·과테말라·온두라스의 옥수수밭에 함께 돋아나는 잡초인 테오신트가 야생조상종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옥수수는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의 뉴멕시코주를 거쳐 유타주, 콜로라도주로 전파되었으며 1400년에는 미주리강과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널리 재배되면서 19세기에 콘벨트가 형성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종으로 순화과정을 거친 옥수수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이탈리아·투르크·북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다.
아시아에는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인을 통해 들어왔고 인도-티베트, 투르크-이란 두 가지 경로로 중국에 들어갔다.
조선에는 17세기 이후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1592년) 전후에 도입되었으며 최초 문헌 기록은 『역어유해(譯語類解)』(1690)로 알려졌다.
옥수수라는 이름은 곡물 중에 겉껍질을 벗기면 바로 옥(玉)과 같은 알곡 형태가 되는 것이라서 그렇게 명칭이 붙게 되었다.
중국 농서와 조선 농서에서 나오는 ‘촉서(蜀黍)’는 촉(蜀) 지역에서 비롯된 찰기장(黍)이라는 뜻과 수수의 일종으로 인식하면서 옥수수(玉蜀黍)라 부르게 되었다.
『농사직설』의 수수 재배법에는 촉서 항목에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으나 본격적인 경작법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조선에서도 실행한 재배법인 ‘구전법(區田法)’은 가로, 세로 각각 1.5척인 구(區)를 1척 깊이로 파서 숙분(熟糞)을 넣어 경작하는 방법인데 야산이나, 주거지 근처, 높은 지대의 경사진 곳에서도 가능한 방식으로 작물이 거름을 충실히 흡수해 소기의 수확을 거두려 한 것이다. 산간 지역이 많은 강원도에 잘 정착된 것도 이런 강한 생육 습성이 작용했기때문이다.
옥수수가 전래된 17세기 이후 음식문화에서는 옥수수가 수수와 함께 구황작물로 등장하고 있다.(『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당(䅯)은 수수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대부분 옥수수를 뜻하는 단어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1671년(현종 12) 경신대기근이 한창이던 당시에 함경도 6진 지역이 더욱 심하니 수수대를 가루로 만들어 먹을 만한 풀과 섞어서 겨우 아침저녁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내용에서 수수대와 산야초를 섞어 만든 구황식품이 등장하는 데에 언급되고 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옥수수는 가루로 만들면 식량으로 충당할 수 있으니 맛이 좋기가 보리나 밀가루와 맞먹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옥수수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서 옥수수 활용법으로 ‘증식(蒸食, 쪄 먹기)’, ‘작죽(作粥, 죽 만들기)이 매우 적당하고 율무보다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이용하고 있는 옥수수 활용 방법으로 일반적인 조리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원 지역에서는 옥수수를 활용해 옥수수밥, 강냉이밥이라 불리는 조리법을 예전부터 사용하고 있다. 옥수수밥은 옥수수 알갱이와 감자, 콩, 팥 등을 추가해 짓는 밥이다. 우선 옥수수를 잘 말린 다음 발방아로 찧어 껍질을 벗기면 옥수수 알갱이가 부서지는데 껍질 벗긴 옥수수 알곡과 부서진 알갱이가 바로 옥수수쌀이다.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활용하는 음식으로는 올챙이국수, 올창묵이 있다. 옥수수 알갱이를 물에 불려 맷돌에 곱게 갈고 물을 적당히 섞어 이것을 뭉근하게 끓여 묵을 만든다.
묵을 만들 때 점도가 적당한 상태에서 구멍 뚫린 틀에 통과시켜 찬물을 채운 대야에 떨어지는 것이 방울진 형태가 되는데 이때 점도가 높으면 잘 끊어지지 않고 국수 가닥처럼 길게 나오는데 그 모양이 올챙이를 닮은 형태가 되어 올창묵, 올챙이 국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료 출처: (강원학 학술총서 23) 강원의 먹거리 메밀, 옥수수, 감자의 역사문화적 연구(염정섭,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