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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원의 ‘고갯길’을 가다> ⑧ 백복령, 소금이 넘어오던 소금고개

 백복령은 정선군 임계면과 강릉시 옥계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입니다.


 정선과 동해는 백복령을 사이에 두고 삶을 이어왔습니다.


 정선의 산골 사람들과 동해의 바닷가 사람들이 산나물과 해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오랫동안 이 고개를 넘나들었습니다.


 1937년 47번 국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로이자 조상들의 애정과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길은 충북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영월까지 닿았습니다.


 정선 일대는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에 의지했습니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습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해서는 선뜻 알려주는 이가 없습니다.


 이 고개는 사료마다 한자가 달리 쓰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택리지’에는 백복령(白鳳嶺)이라 했고, ‘중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서는 ‘百福嶺’(백복령)과 ‘百復嶺’(백복령)을 혼용하면서 일명 希福峴(회복현)이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입니다.


 최근 산림청에서 세운 표지석과 지도에는 백복령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백봉령’은 ‘복령’이라는 약초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흰 복령이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1961. 4. 22 건설교통부고시’에 백복령으로 고시됐습니다.



 최유해의 ‘영동산수기’에서 백복령이 언급됩니다.


 최유해는 1620년 분호조 낭관으로 차임되어 북로의 물화를 전담했습니다.


 그는 심열, 김신열 등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마다 일을 맡길 정도로 재정을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합니다.


 그는 영동지방을 살펴보고 금강산을 유람했습니다.


 1620년 9월 15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양에서 출발하여 원주, 삼척을 거쳐 영동지방을 살펴보고 금강산 유람을 하며 ‘영동산수기’를 남겼습니다.


 그때 정선을 거쳐 삼척으로 갈 때 백복령을 넘어간 기록이 있습니다.


 ‘영동산수기’에서 백복령은 산이 험하고 바위가 가파릅니다. 실로 험한 산새라고 언급한 만큼 험난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복령 정상에서 임계 시내 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먹거리촌이 있습니다.


 이 먹거리촌은 정선 갓전병을 비롯해 감자옹심이, 메밀국수, 도토리묵, 감자전, 메밀전, 막걸리 등 강원도의 토속 음식을 판매합니다.


 42번 국도를 경계로 상행과 하행 모두 촌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식당 주인들은 대개가 인근 마을 주민들입니다. 남편은 고랭지 농사를 짓고 아내는 정선의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식으로 삶을 이어갑니다.


 이곳 먹거리촌에는 백복령 표지석이 있는데, 뒷면에 ‘정선아리랑’ 가사 유래가 전해집니다. 표지석에는 “옛날 정선에 정숙한 아내가 험준한 백복령을 넘어 강릉, 삼척으로 소금을 사러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불렀다는 정선아리랑 노래 중의 하나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백복령 먹거리촌에는 또 다른 명소가 있습니다.


 백복령 인근의 임계면 직원리 일대로 카르스트 지대를 이룹니다.


 카르스트 지형은 석회암이 분포되는 지역에서 확인됩니다.


 석회암의 표면을 따라 빗물이나 지하수가 흘러 석회암이 녹으면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형태의 지형입니다.


 특히 이곳은 생태적으로 보전 가치가 매우 높은 곳으로, 지난 2004년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됐고, 현재 고생대 지질공원으로 지정됐습니다.


 (자료도움: 강원학연구센터)

이종우 기자 jongdal@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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