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기획: 관동별곡 강원 800리 추적> ① 조선의 대문호 정철

 ‘관동별곡’의 작가 정철은 호평과 악평이 공존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절세 가인이지만, 정적에겐 혹독했던 정치가였습니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비판을 가하는데 거침이 없었던 탓에 주변에 적이 많았습니다. 


 오랜 친구였던 율곡에게 ‘제발 술을 끊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는 충고를 들어야 할 만큼 고집불통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선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이항복은 “반쯤 취했을 때 손뼉을 치면서 담소하는 것을 바라보면 천상의 사람 같았다”고 할 만큼 선인의 풍모도 가졌습니다.


 정철은 1536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죽산 안씨 슬하에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복궁에서 불과 1킬로미터 정도에 위치한 정철의 생가 터는 현재 초등학교가 들어섰습니다.


 학교에서는 입구에 ‘정철의 탄생지’라는 표석을 세우고, 담장에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에 대한 시비 등 기념물을 제작, 전시해 이곳이 조선의 대문호가 태어난 곳이라는 자긍심을 내놓고 있습니다. 

 

 본관은 영일, 자는 계함, 호는 송강입니다.


 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둘째 누이가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었기에 어려서 궁중 출입이 자유로웠습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면서 총애를 받았습니다.


 1561년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27세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을 때 명종은 “정철이 급제하였다”고 기뻐하면서 술과 음식을 내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같은 좋은 환경은 정철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거세게 불어오는 비바람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545년 매형 계림군이 역모죄에 연루되어 처형당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되었고, 맏형도 곤장을 맞고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과거를 준비하던 둘째형은 전라도 순천으로 은거해 버렸습니다. 


 1551년 원자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가 특별 사면되자 온 가족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으로 이주했습니다.


 광주광역시 충효동 환벽당에는 정철의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환벽당에 따르면,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어느날 환벽당에서 낮잠을 즐기는데 평소 낚시하던 냇가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그곳에 내려가 보니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는데, 정철이었습니다.


 김윤제는 정철을 아껴 외손녀 사위로 삼고 관계에 나아갈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덕분에 정철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훗날 가사문학의 대가로 성장하는 자양분을 얻게 됐습니다.


 정철은 그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송강이라 했습니다. 


 아이를 만나 담론을 나눈 뒤 깊이 교류했으며 부모의 삼년상을 법도에 맞춰 치르는 등 스스로도 청백하고 곧은 성품으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벼슬길에서는 분쟁에 휘말려 낙향과 입조를 반복했고, 1580년 1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됐습니다. 


 관찰사로 순력에 나서 민생을 살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적 자질을 보여주는 ‘관동별곡’을 썼습니다. 


 또한 ‘훈민가’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자료도움: 강원학연구센터)

이종우 기자 jongdal@g1tv.co.kr
Copyright ⓒ G1방송.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