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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대표 일꾼> 강원도의회 박영림 의원 (비례)


어릴 적 소아마비 앓으면서 삶 ‘고군분투’

그의 첫 인생 멘토 어머니 “자만도 좌절도 하지 말라”

“소외된 이들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던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어”

 

학교를 다니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상. 박영림 강원도의회 의원(비례)에게 그 평범한 삶은 오랫동안 '투쟁'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첫 선거 명함에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정치"라는 슬로건을 적었다. 장애인 당사자이자 30여 년 사회복지 현장을 지켜온 박 의원의 걸어온 길을 들여다 본다.

 

박 의원은 생후 10개월에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됐다. 17개월 터울의 오빠도 이틀 간격으로 같은 병을 앓았다. 1960년대, 국내에 예방접종약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외국에서 수입한 소아마비 예방주사를 맞혔지만, 삼남매 중 두 명이 장애를 갖게 됐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죄책감 속에 방황했고,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부모는 자녀의 다리를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니느라 많은 재산을 잃었다. 그래도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만큼은 놓지 않았다. 남매는 아버지의 자전거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초등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에는 오빠와 함께 서울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에 1년간 입원했고, 보조기를 착용하고 겨우 걸음을 뗐다. 그러나 고향 평창으로 돌아온 뒤 주변의 시선과 불편한 환경 탓에 목발과 보조기는 다락에 던져졌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척추측만증이 심해져 휘어진 등뼈가 폐와 배를 압박했다. 숨쉬기조차 힘든 시간이었다. 부모는 수술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전국을 헤맸고, 서울대병원에서 마침내 수술을 받았다. 2년을 휴학하며 네 차례 수술을 받았고, 1년간 통깁스 상태로 누워 지냈다. 박 의원은 "힘든 시간이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고 돌아봤다. 수술 이후 그는 목발과 보조기에 의지해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됐다.

 

나무로 좌변기를 만들어 들고 다니고 겨울마다 동상에 시달렸지만, 어린 시절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애 없는 삶을 알지 못했고, 부모가 장애를 느끼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짐작한다. 대학 입학 때 겪은 입학 거부는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처음 또렷이 마주한 경험이었다. "일상을 살아가려면 끝없는 투쟁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부모의 관심이 장애를 가진 자신과 오빠에게 쏠렸던 시기 막내 동생이 느꼈을 외로움을 어른이 되어서야 헤아리게 된 것은 장애인 가족 지원 정책을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장애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과 장애인 편의시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약대 대신 강원대 건축공학과를 택했다. 졸업작품으로 설계한 '강원도종합재활지원센터'는 우수상을 받았고, 이는 도내 최초 장애인복지관인 강원도장애인종합복지관 설계팀 참여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에는 창립 멤버로 입사해 각종 규정을 마련하며 개관을 준비했다.

 

2000년 1월, 전국 최초로 강원도청에 장애인민원실이 설치되자 전문계약직으로 16년간 근무했다. 그는 도내 수많은 장애인을 만나며 그들의 민원을 정책으로 만들어냈다. 2001년에는 장애인을 생각하는 공무원 20여 명과 봉사단체를 조직했고, 지금은 8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공직을 떠난 뒤에는 발달장애인의 일터인 늘해랑보호작업장 원장을 맡아 의원이 되기 직전까지 10년간 매출 향상과 자립 기반 마련에 힘을 쏟았다.


박 의원에게는 인생의 지침이 된 세 명의 멘토가 있다. 첫 번째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평생 "인생은 삼한사온 같다. 좋은 일이 있어도 자만하지 말고, 나쁜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말라"고 말했다. 장애를 가진 딸에게 "안됐다"고 한 적이 없고, 통깁스로 누운 딸에게 수학책과 영어책을 내밀 만큼 강하게 키웠다.

 

고등학교 교련 선생님은 교실에 혼자 남은 그에게 늘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을 해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라"고 했다. 박 의원은 도청을 그만두고 나올 때 의원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소아마비 장애인이자 의사였던 정립회관 창립자 황연대 관장은 중학교 3학년 연수에서 "장애인이라고 아무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늦은 만큼 더 노력해야 뒤처지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복지관 10년, 도청 16년, 보호작업장 10년을 거치며 박 의원은 늘 목마름과 답답함을 느꼈다.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조금 더 내 말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곳이 정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적극 대변할 길을 정치에서 찾았고, 10년 전 공직을 떠나며 그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비례대표 의원인 그에게 강원도 전체가 지역구다. 박 의원은 이를 장점으로 꼽는다. 도내 전역의 사회복지를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발전과 인구소멸, 지방자치가 화두인 지금 시군 간 복지 인프라 불균형과 의료 공백을 어떻게 풀지, 지역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통합돌봄을 어떻게 안착시킬지가 그의 고민이다. "지역구 의원으로서 지역을 챙기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며칠 전에는 도내 장애아전문어린이집 원장들을 만났다. 도내 4개소뿐인 이곳들은 상대적으로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20~30년을 운영해 왔지만 도의원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며, 원장들은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건넸다.

 

"모든 문제를 다 풀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통과 공감을 잘하고, 방법을 함께 찾으려 노력한 의원,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던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박 의원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일이 중증 장애인에게는 전쟁이자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장애인화장실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고, 창고 같은 화장실에서 겨우 용변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며, 힘이 없다는 이유로 학대받는 주민이 50여 년간 방치되지 않는 세상. 그가 그리는 '함께 사는 세상'이다.

이종우 기자 jongdal@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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