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등재 이룬 뚝심, 지역위해 다시 불사릅니다”
심오섭 도의원의 고향은 오지 중의 오지라고 불렸던 깊은 산골마을 삼척 하장이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고 한다.
매일 10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드는 틈틈이 친구들과 산과 들을 뛰놀던 티없이 순수했던 산골 출신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부친이 더는 자식들을 시골에서 키워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가족을 데리고 강릉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덕분에 심 의원은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강릉은 그의 삶의 중심이자 뿌리가 된 것이다.
심 의원은 대학에서 전자계산공학을 전공했다. 당시에는 유망한 분야로 여겨졌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적성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그는 수학처럼 정답이 하나인 분야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답이 존재하는 그런 인문적 관계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학 4학년 때 취업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강릉문화원의 업무를 잠깐 돕게 됐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처음에는 그곳에 잠깐 머무를 생각이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기획하는 일이 의외로 재밌고, 적성에 맞다는 걸 알게 됐고, 특히 강릉단오제 준비는 엄청난 고됨 속에서도 큰 보람을 안겨줬다.
그렇게 그는 30년 동안 강릉문화원에서 지역문화를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문화기획자로서 입지를 다져 왔다.

그가 꼽는 생애 최고의 순간은 지난 2005년,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때이다.
강릉단오의 고유성과 전통성,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에 주목하여 2010년, 정부는 종묘제례악과 판소리에 이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의 문화유산국이 준비를 총괄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외교통상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강원도, 강릉시 등 각 기관이 역할을 분담했으며, 지역에서는 강릉문화원이 실무를 맡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실무 작업의 중심이었던 심오섭 의원의 눈물겨운 노력과 분투가 큰 역할을 했다.
등재 신청을 위해서는 방대한 분량의 신청서 작성은 물론, 10분 분량과 2~3시간 분량의 영상물 제작, 사진첩과 슬라이드 필름, 관련 자료나 시설 사용에 대한 허가와 동의서, 그리고 각종 참고 자료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 모든 과정은 몇 년이 걸릴 정도로 방대한 작업이었고, 그 준비와 조율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심 의원은 회고한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려 하자, 중국이 "단오는 중국의 전통 명절"이라는 이유를 들어 신청 자체를 견제하며 반발한 것이다.
단오는 절기 명절을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강릉단오제는 강릉이라는 지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고 계승된 고유명사로, 대한민국의 특별한 문화자산이자 인류 공동의 유산임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한 결과, 우리는 중국의 반대를 극복하고 등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신청 과정 내내 비관론이 팽배했고, 실제로 일부 기관에서는 신청을 포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결과, 마침내 등재 성공이라는 기적 같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강릉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심 의원은 ‘지역민들에게 어떤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정치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강릉 시민으로서, 이 도시의 문화와 사람들, 그리고 미래를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강릉의 발전을 위해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앞장서서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해 왔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기억은 제 삶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강릉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진심을 다했던 사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