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군 횡성읍에서 42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안흥에서 평창 방림으로 가는 길에 ‘문재’라는 고개가 나옵니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사자산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버스로 왕래했습니다.
그러다 1995년 안흥면과 방림면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는 문재터널이 완공되면서 문재를 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문재는 한동안 임도로 사용되다가 ‘명품숲’ 탐방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홍천국유림관리소에서 숲 탐방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탐방로입니다.
횡성 상안리 방면 길 입구에는 ‘명품숲 입구’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숲 해설사가 머무르는 천막이 보입니다.
숲 해설사에 따르면 현재 이곳이 문재 옛길이고 낙엽송과 소나무가 우거져서 산림청이 2019년에 국유림 명품숲으로 선정했습니다.
‘문재’ 이름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독현이라 했고, 이후 독자가 유지되면서 독령, 독치 등의 명칭으로 기록됐습니다.
이곳을 지났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대개 오늘날 안흥면에 해당하는 안흥역에서 출발해 문재를 넘고, 운교역을 거쳐 방림역에 이르는 경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지명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여정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재는 조선시대 관동지방을 향하는 중요한 관로의 하나로 활용됐습니다.
조선 전기 세종이 문재(독현)를 지난 행차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데 행차 이후 즉위한 국왕들은 사실상 관동지방을 방문하지 않으면서 정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만큼 남아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세종대의 정황을 볼 때 문재는 한양과 관동지역을 잇던 중요한 도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권오복은 1490년 11월 28일에 문재를 넘고 방림역에 들러 문재를 넘은 소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권오복은 1490년 사헌부 감찰인 행대로 관동지방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정 중에 지은 시 ‘관동록’을 남겼습니다.
안흥역에서 밥을 먹고 문재를 넘어 방림역에 도착했다고 하였는데, 문재를 넘었던 기억이 무척 인상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를 보면 험준한 고개를 넘는 과정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인간 세상의 자취가 없어서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를 통해 문재는 조선 전기 관동지역과 왕래하는 대표적인 관로였음에도 사람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그윽한 길’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재는 조선시대 대로(大路)인 관동대로 노선에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 문재옛길로 알려진 길은 조상들이 사용하던 옛길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차량을 운행할 수 있을 정도의 노폭으로 확장되어 개설된 도로를 말합니다.
문재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강원도 산자락의 전망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이곳이 국도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과 표지석이 있습니다.
정상에서 42번 국도를 따라가면 평창군 운교리 마을이 나옵니다.
운교리는 본래 강릉군 대화면의 한 지역으로, 구름다리가 있어서 구름다리, 또는 운교라 불렸습니다.
운교리 마을길은 칡사리길로 돼 있는데, 이는 운교리 방면에 있는 횡성군에서 평창군으로 넘어가는 ‘칡사리고개’와 연관이 있습니다.
칡사리고개를 ‘칡사구리비’ 또는 ‘칡사리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치 칡을 사려놓은 것처럼 이뤄져 있어서 칡사리 굽이라고 이르는 겁니다.
문재의 정상부에 올라가면 네 갈래의 길이 나옵니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안내판이 있는데 평창의 방림면과 횡성의 안흥면을 알려줍니다.
이 곳은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깃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터널이 뚫리면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득한 길’이 됐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 길은 새로운 생명이 더해졌습니다.
‘명품숲’ 길로 조성되면서 일제 강점기 때 심어졌던 낙엽송과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자료 도움: 강원학연구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