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령(五色嶺)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북면을 연결하는 설악산의 고갯길로, 해발 약 1,100m에 위치한 비교적 높은 고개입니다.
한때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지금은 등산객과 자연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로 남아 있습니다.
오색령은 ‘다섯 가지 색을 띠는 고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가을철 오색령 일대가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 갈색, 초록색 등 다채로운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오색령 아래에 위치한 오색약수터와 오색마을의 이름과도 연결되며,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오색령을 통해 영동 지방(양양)과 영서 지방(인제)을 넘나들었으며, 보부상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교통로였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산길로 인해 통행이 쉽지 않았고, 겨울철에는 폭설로 인해 고립되기도 했습니다.
오색령은 한계령으로도 불립니다.
예부터 영동과 영서를 분수령으로 일컬어졌으며 내륙과 동해안을 잇는 침략상 교통의 요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내설악과 남설악의 경계지점에 있기 때문에 2개의 지명을 갖고 있습니다.
‘한계’라는 지명은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쓰이고, ‘오색’은 양양군 서면 오색리의 지명으로 쓰입니다.
이 때문에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을 잇는 백두대간 고갯길의 지명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양양군은 “일제 강점기에 이름이 바뀐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인제군에서는 “1961년 정부 고시를 통해 한계령이 행정.법정 지명으로 사용되며 44번 국도 도로 안내판과 교과서 등에서 한계령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계령 정상부에는 오색령의 지명 유래가 있는 표지석이 설치됐지만, 현재의 공식 명칭은 ‘한계령’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를 소개했는데, 그 중 ‘오색령’을 최고라고 했습니다.
고문헌에서 처음 지칭한 명칭은 ‘소솔령’이었는데, 이는 “선조 29년 2월에 비변사가 적병이 영동으로 침입하면서 이 영을 넘을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기록한 것이 오색령 지며의 효시”라고 합니다.
오색령은 예로부터 양양에서 인제로 생필품을 운반하던 고갯길이자 양양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제 사람들이 수산물을 구하기 위해 넘었던 고갯길이었습니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을 보면,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한계령은 이들 마의태자 일행이 몹시 추웠던 것을 되새겨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높은 봉우리 때문에 겨울이면 북풍의 통로가 되어 바람이 거세고 추위가 매섭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한계령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많습니다.
과거에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 설악산,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했다는데, 고개의 이름이 한계산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곳은 1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1년에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포장이 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시절 민간의 능력으로 험준한 산악도로를 뚫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육군 3군단 야전공병단이 동원됐습니다.
당시 군단장이었던 김재규가 준공을 기념하는 정자와 희생 장병 위령비를 세웠으나,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그 흔적이 지워졌다고 합니다.
현재의 한계령이 유명해진 계기는 장덕수의 ‘한계령에서’라는 시를 ‘한계령’이라는 가요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가수 양희은씨 특유의 애환이 서린 목소리로 전 국민이 사랑하는 대중가요가 됐습니다.
(자료 도움: 강원학연구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