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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원의 ‘고갯길’을 가다> ⑥ 대관령, 영동과 영서의 큰 관문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해발 832m의 험준한 고개가 있습니다.


 바로 대관령(大關嶺)입니다.


 예부터 고개가 너무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영동지방으로 오는 ‘큰 관문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 정도로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대관령이었습니다.


 대관령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영동지역 사람들은 그 너머의 다른 세상을 만나려면 대관령을 넘어야 했습니다.


 대관령은 과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이자 중요 교통로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중들이 가지각색의 사연을 갖고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관령은 강릉을 비롯한 영동 주민들이 서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때문에 역사와 문화적으로 영동지역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큽니다.


 대관령 동쪽 경사면의 도로를 아흔아홉 굽이라고 합니다.


 옛날 강릉에서 서울이나 영서로 갈 때 구산을 지나 굴면이, 원울이재, 제멩이, 반젱이, 웃반젱이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 다녔습니다.


 ‘아흔아홉 굽이’라는 대관령의 별칭은 율곡 이이의 일화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설 때문에 대관령을 아흔아홉 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흔아홉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굽이의 수가 아니라 ‘많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과거의 대관령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험준한 고개였습니다.


 옛날 강릉 사람들은 흔히 “강릉에서 태어나서 평생 대관령을 한번도 넘지 않고 죽으면 그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강릉이 그만큼 살기좋은 도시였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달리 해석하면 대관령이 얼마나 험한 지대였나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대관령의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명주’는 강릉의 옛 지명이고 ‘큰 고개’는 대관령을 의미합니다.


 ‘태종실록’에서는 ‘대령산’으로 기록돼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릉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의 진산이다. 여진 지역인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아흔아홉 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로 향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 부르기도 한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고개의 규모가 크고,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관문이라는 데서 그 지명이 유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도보로 고개를 걸어 넘던 때에는 성산면 어흘리로 들어가 하제민원과 상제민원에 이르고, 그 후에 골짜기에서 따라 가다가 벗어나 주의의 급경사면을 오르는 길이 이용됐습니다.


 하제민원과 상제민원은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서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입니다.


 대관령 위에는 횡계역이 있었습니다.


 대관령 정상에 이르면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범일국사가 머무는, 대관령국사성황당과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산신당이 있습니다.


 강릉단오제의 중심이 되는 범일은 신라 때 강릉지역의 지배세력이었던 강릉 김씨 출신으로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연 것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강릉단오제의 중심이자 강릉지역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대관령산신, 대관령국사성황, 대관령국사여성황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삼국을 통일한 장군이고 범일국사는 고려 건국에 힘을 보탰던 승려입니다.


 역사에서는 승리한 사람을 신으로 모시기도 하는데, 여성황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가장 실패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행상들을 비롯해서 관동팔경을 구경하려던 풍류객 등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강릉에서 큰 뜻을 품고 대관령을 넘었던 이이와 허균은 역사를 남겼고, 서울에서 풍류을 찾아 대관령을 넘어 온 김홍도와 김정희는 예술을 남겼습니다.


 관원으로 강릉을 찾아온 송강 정철은 문학작품을 남겼고, 대관령을 넘어 시집을 갔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그리움을 남겼습니다.


 (자료 도움: 강원학연구센터)

이종우 기자 jongdal@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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