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부 양양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2편

    방송일 20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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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4개월의 ‘미군정’ 기간]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경계로 이북에 위치한 양양은 국군의 북진으로 수복이 되면서 유일한 미군정지역으로 주민들은 수많은 변화를 몸소 겪게 된 특수한 지역이다. [교육실험, 정보실험의 장 ‘양양’] 미군정의 점령 하에서 민간인 거주가 허용된 유일한 지역, 양양. 미군정 통치의 목적은 한마디로 각종 ‘실험’이었으며, 각종 정보실험 및 월남 한국인들을 순화하기 한 교육 실험장이었다. ‘DMZ스토리’에서는 양양의 미군정을 바탕으로 수복된 지역의 당시 양양주민들의 생활상과 양양의 발전 과정에서 영향을 미친 미군정의 교육실험이 무엇을 뜻하고 있었는지 양양문화원과 전문가들의 증언과 자료를 재정리해본다. [인민에서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그들의 이야기] 한국전쟁 시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각종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양양. 당시 미군정 관할 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당시의 미군정이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들여다본다.

  • 254부 양양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방송일 201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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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수복된 38도선 이북 땅] 한국전쟁 중 수복된 38도선 이북 땅은 강원도 7개 군, 경기도 2개 군. 수복지역은 정전이 이뤄지기까지 비상계엄 상태에 놓였고, 원주민은 모두 소개, 피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의 접근도 금지되었다. [외부와 고립된 유일한 지역, 양양] 그러나 여기에 단 한 군데 예외 지역이 있었다. 미군정의 점령 하에서 민간인 거주가 허용된 유일한 지역, 양양이다. 전쟁 시기 양양에는 노무단이 창설돼 9만 명 넘는 민간인들이 모여들었고, 미군들을 상대로 한 이발소, 유흥업소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왜 미군과 UN군사령부측이 양양지역에만 군정을 실시하였을까? 당시 동해전선에는 미군 첩보부대와 국방군 유격부대가 주둔하면서 이북에 침투, 교란작전 및 첩보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DMZ에서 만나본 미군정시대의 비밀] 한국전쟁 시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각종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양양. 당시 미군정 관할 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당시의 미군정이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들여다본다.

  • 253부 DMZ,깃대전쟁

    방송일 201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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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에서 시작된 깃대전쟁] 휴전회담은 하나부터 열까지 치열한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당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그런 가운데 벌어진 웃지 못 할 양측의 신경전 하나!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 측이 작은 유엔기를 협상테이블에 놓자 미처 국기를 준비 못한 공산군 측은 이날 오후 유엔기보다 10센티미터 높은 북한 국기를 협상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유엔군도 더 높은 깃대를 준비하는데... 이렇게 유엔군과 북한군, 양측은 깃대 높이기 경쟁에 돌입했다. 깃대의 높이, 굵기, 받침대까지 크기 경쟁이 펼쳐졌다. 회담장에 들여놓지 못할 만큼 커지자 양측은 깃대의 규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의미한 자존심 경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과거엔 깃발 높이를 두고 경쟁이 붙어 회담장 안으로 못 들여올 정도로 높아진 때도 있었다.” - 김영규 한미연합사령부 공보관 - [대성동, 기정동 마을에서 다시 시작된 깃대전쟁] 그런데... 정전협정 이후, 다시 시작된 깃대 전쟁! 바로, 한반도 유일의 DMZ 안 거주지인 남한의 대성동과 북한의 기정동 마을에서였다. 두 마을에서 국기 높이 달기라는 체제 우월 경쟁이 시작된 건 1954년 말. 먼저 기정동에 30미터가 넘는 깃대가 세워졌다. 이에 뒤질세라 대성동에는 이듬해 기정동의 깃대보다 18미터 더 높은 48미터짜리 깃대가 세워졌다. [보이지 않는 두 마을의 신경전] 이렇게 시작된 깃대 경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됐고, 결국 기정동에서 무려 160미터짜리 깃대(세계에서 가장 높은 깃대로 기네스 기록에 등재되기까지 했다.)를 세우기에 이르는데...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개의 국기 게양대... 분단시대가 나은 슬픈 풍경... 두 마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에서 만나본다.

  • 252부 고려인 남북 종단 통일랠리

    방송일 201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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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년 전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 ] 남한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한국의 디아스포라 고려인들. 우리는 그들을 ‘카레이스키’라고 부른다. 150년 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에 몸 바치던 조선인 20만 명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어 지금의 러시아와 주변국까지 뻣어 살아가고 있다 러시아 이주 역사 150년이 되던 2014년 8월,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러시아 국경을 넘어 북한을 지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했다. [ 150년이 흘러도 잊지 않은 고향 땅 ] 150주년 기념 유라시아 횡단 대장정에 참가한 단장, 김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인들은 왜 조국이 2개인지 늘 생각했어요. 조국이 하나이길 바랐어요. 사람에게 태어난 곳은 하나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유라시아대륙과 북한을 지나 남한까지 도착하는 1만5천 킬로미터의 대장정. 러시아 이주 역사 150년이 되던 2014년, 그들은 조상들의 강제이주 루트를 따라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남과 북을 종단하며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는 대장정은 시작됐지만 군사분계선을 넘기까지 남과 북의 소통 부재, 불신으로 과정들이 순탄치 않았다. 마침내 8월 16일 이를 극복하고 그들은 고국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DMZ스토리에서는 과거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끌어안은 고려인의 통일 랠리를 정리해본다.

  • 251부 '머릿속 총탄', 죽어서야 끝난 전쟁의 고통

    방송일 20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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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아픔과 수많은 역사의 증거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전쟁 기념관. 그곳에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두개골 X-ray 사진이 총탄과 함께 전시돼있다. 바로 참전용사 이학수 씨의 두개골 X-ray 사진이다. 왜 그의 두개골 X-ray 사진이 기념관에 전시된 것일까? 1952년 임진강과 사천강 지역 사수를 위해 한국군 해병대 제1전투단과 중국군 간 벌어진 ‘장단지구전투’ 당시 22살이었던 이학수 씨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참전 중이었다. 중국군의 기습으로 이학수 씨는 동료 소대원 대부분을 잃고 기적처럼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총탄 파편이 그대로 박힌 상태였다. 총탄 제거 수술의 위험성으로 인해 50여 년간 머릿속에 총탄 파편이 박힌 채 살아야 했던 이학수 씨. 평생을 통증 때문에 똑바로 누워 잠들지 못했으며, 60대 이후 세월의 3분의 1은 병실에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도 병상 일기를 통해 전쟁의 기억과 그리운 동료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써 내려 갔다 .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써 꺼낼 수 있었던 총탄. 살아생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아들 이병기 씨는 평생 아버지를 괴롭혔던 총탄과 함께 아버지의 유품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한다. 이번 주 에서는 故 이학수 씨의 아들 이병기 씨를 만나 참전용사 이학수 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