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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독립.2> 가장 크고 처절했던 '양양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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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리포터]
양양 3.1 독립만세운동은 크게 유교와 기독교계, 두 축으로 시작됐습니다.

유교계는 고종 국장에 다녀온 뒤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온 이석범 선생에 의해 촉발됐습니다.

특히 이석범은 함평 이씨 문중 마을인 임천리를 중심으로 청장년들을 포섭했습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지역 어르신들의 뇌리에는 흐릿하게나마 그때의 만세운동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인터뷰]
"밤에 태극기를 돌리고 이랬다는 소리만 들었지, 다른 것은 못 들었어요. 태극기를 돌렸다고 그러더라고요."

[인터뷰]
"(독립운동을) 저 위에 우리 큰댁도 큰 시아버지하고 둘이래요. 그런데 큰 시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시고, 그 집은 자손도 없고 다 없어요."

당시 임천리는 양양 만세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stand-up▶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제 뒤로 보이는 대나무가 심어진 곳이 양양 독립운동의 출발이자, 본거지가 되었던 이교완 선생이 살던 생가 터 입니다."

기독교계는 유관순 열사의 시누이 이기도 한 조화벽 선생이 주축이 됐습니다.

조화벽은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 신분으로 버선목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원산에서 배를 타고 속초 대포항으로 들어오다, 일제에 검문을 당했지만,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임천리에서 활동하던 유교계 독립 운동가들과 세를 합치면서 양양독립운동은 본격화됐습니다.

/가장 컸던 시위는 4월4일 양양장날 시위로, 임천리와 거마리, 상평리와 북평리, 감곡리, 조산리와 사천리 등 양양 장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시위대가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군수와 경찰서장이 모두 도망칠 정도로 집회가 격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양양만세운동은 이후 지역마다 소규모로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양양지역이 당시에 132개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82개리의 주민들이 참여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역의 주민들이 참여해서 시위를 했고.."

1919년 4월3일부터 9일까지 주로 전개된 양양만세운동은 최소 만5천여 명이 참가했으며, 11명 사망에 50여 명이 부상을 입고, 170여 명이 체포되는 등 도내에서 가장 처절했던 시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G1뉴스 홍서표입니다.
홍서표 기자 hsp@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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